수필- 콩을 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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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그란 콩들, 칠이 터진 낡은 밥상 위에서 콩을고른다. 콩이 먼 산을 넘어온 파도 소리처럼 촤르르 촤르르 몰려다닌다. 밤이 깊어 간다.


내가 콩 자루를 방안에 끌고 들어왔을 때 국화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물 주전자, 커피, 사과 껍질들이 쌓여 가곡 흐릿해지는 조명에 콩 비린내가 버부려진다. 이때쯤 내 방에 시계가 성큼성큼 거꾸로 가고 있었을까? 나는 시대를 거슬러 몇 세기 전 어느 시골 노파의 방으로 점프를 한 듯한 풍경에 갇혀 버린다. 


그때 노파가 접었던 다리를 펼 때마다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와 허리를 펴는 신음이 간간히 새어나오기도 했으리라, 밖은 마땅히 눈이 내리리라. 이따금 쌓인 눈이 퍽퍽 떨어지고,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으리라. 그렇게 깊어 가는 겨울밤이라면 이 보다 더한 낭만적인 노동이 또 있을까?


요즘 콩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면 너나없이 기계로 콩을 턴다. 탈곡기 안에 콩대까지 통째로 넣으면 북데기는 다 날아가고 콩만 타다다닥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나는, 콩도 지난여름 보리타작 때와 마찬가지로 소형 자동차로 털었다. 마당에 널찍하게 펴 놓고 차로 왔다 갔다만 하면 되는 일.


콩은 두들겨 맞아야 깍지가 터진다. 차의 무게에깎지를 터뜨리지 않고 버티는 놈은 그리 많지 않다.더구나 두들겨 맞으면서 멀리 튀어 나가는 것이 놈들의 특기라면 특기인데 고놈들 주우러 다니는 일이 없으니 일을 쉽게 끝낼 수 있었다.


콩 한 개는 무게랄 것도 없이 가볍다. 그 무게랄것도 없는 알맹이지만 알맹이라는 이름만으로 웬만한 바람에 꿈쩍도 하지 않는 자존심을 자랑하는것이 또 놈들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부는 날을골라 북데기를 날리고, 겨우내 이 낭만적인 노동을 무슨 기도처럼 하는 것이다.


물론 콩 고르는 기계도 있다. 들은 물론, 콩이 되지못하는 콩조차 골라내는 신통한 기계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몇 가마니쯤 수확을 하는 사람들 얘기다. 나 같이 몇 말 정도 하는 사람들은 기계 빌리는 삶이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가 있다.


이렇게 수확한 콩들이다. 놈들은 밤이 깊어갈수록밥상 위에서 검은 바다를 헤치고 다니는 다니는 살찐 물고기의 형형한 눈동자가 된다.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떼를 지어 모였다 흩어지는 놈들. 놈들은 소리에 따라 모양도 달라진다.


앞쪽으로 몰려 뭉툭하게 꼬리를 뜯어 먹힌 삼치가되고, 위쪽으로 몰릴 땐 날개가 찢어진 가오리가 되었다가, 이내 뭉클뭉클 살이 무너지는 곰치 한 마리, 벌레 먹고, 썩은 것들, 콩이 되기 전에 말라 버린 콩. 다 골라내고 잘 여문 것만 남으면 그야말로 놈은 방금 건져 올린 탱탱한 상어다. ‘어디야 어디야’ 놀라휘둥그런 얼굴이다.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놈들을 이리저리 몰로 다니다 깜빡. 먼 대양까지 떠밀려 심연에 빠져들면 놈들을 툭툭 떨어져 소파 밑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가는 당최 놈들은 나를 다른 생각에 빠지도록 두지 않는다.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여지없이 돌을 콩 속으로 던져 넣게 된다거나 멀쩡한 것들을 깍지 속으로 던져넣어 낭패를 보게 된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 고른 콩들을 자루에 쓸어 담는다. 그렇게 모은 콩 무게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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