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문단-소설] 돌배꽃 피고 지듯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피니언

[강화문단-소설] 돌배꽃 피고 지듯

-안 혜 숙-

<지난호 이어서>


“죄송합니다.”

 

기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운전을 하고, 그는 차창 밖 주변을 살핀다. 산 짐승이라도 나타난 것이리라, 토끼는 아닐 테고 고라닌가? 요즘은 멧돼지도 나온다는데…그는 차창문을 활짝 연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덥치자, 크게 숨을 내쉬고는 차창문을 닫다가 주변을 다시 훑는다.

 

옛날에는 언양읍내에서 신불산 뒷산 허리를 걸어서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야 했지만 지금은 새 길이 뚫렸기 때문에 사십여 구비만 돌면 된다는 운전기사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병풍처럼 이어져 있는 계곡과 산등성이를 휘둘러본다.

 

봄이라지만 오두막 제 그늘진 깊은 계곡 아래 아직도 남아 있는 잔설과 산등성이에 하얗게 핀 돌배꽃과 어우러진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옛날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회에 그의 가슴은 점점 벅차고 여전히 택시는 숨 가쁘게 구비 구비를 돌아 산등성이에 피어 있는 하얀 돌배 꽃들을 쫓고 있는 것 같았다.

 

저만치 천황산 중턱에 앞을 가로막는 듯한 크고 웅장한 주걱바위가 나타나면서 예나 다름없이 팔을 떡 벌리고 있는 게 틀림없이 자신을 반기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차가 급정거를 하는 동시에 앞자리 운전기사는 핸들에 고개를 박은 듯 꼼짝 않고 있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대답이 없는 기사를 바라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후다닥 차에서 내려 운전석 쪽 문을 열고 기사를 흔든다. 기사는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본다.

 

“뭡니까 졸았어요?” 화가 난 정명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뒷좌석으로 와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한데, 잠시만 쉬었다 가면 안될까요? 제 욕심으로 하마터면 손님을 잃을 뻔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하마터면 일을 뻔 했다니, 누구를 말입니까?”

 

운전기사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잠시만 쉬었다 가면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알았으니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세요.”

 

기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산모퉁이 갓길에 차를 세우고 풀밭에 앉는다. 정명우도 기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정말 잘못했습니다. 아니, 미안합니다. 하지만 댁까지는 잘 모셔다 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 제가 지병이 있긴 합니다만 잠깐 이러다 맙니다. 요사이 통증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 그만 둬야 하는 일인데 그만 욕심을 낸 것 같습니다.”

 

“지병이 있으신 분이 운전을 왜 하십니까?”

 

“살아있을 때, 한 푼이라도 보태주고 싶은 마음에 그냥 앞 뒤 안 가리고 나왔지 뭡니까?”

 

정명우는 할 말을 잃고 잠시 기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혹시, 암입니까?”

 

“암은 무슨 병이나 됩니까? 요즈은 세 사람 중에 한 명이 암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요란 떨 필요도 없고, 그냥 이대로 있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그냥 조용히 눈만 감으면 끝난다는 생각뿐입니다.”

 

정명우는 기사가 한 말을 입속으로 곱씹는다. 암도 없는 곳에 가서 죽는다. 조용히 간다. 그래, 어차피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가족들은 모르나요?” “가족에게 말하면 뭐 합니까?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저도 편합니다.”

 

그래, 어차피 가는 인생 민폐를 끼쳐 무엇하리, 조용히 소리없이 사라져주는 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 산등성이를 바라보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토록 좋아했던 할머니 산소를 언제 가봤더라….

 

할머니는 어린 손자에게 돌배나무처럼 꿋꿋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고, 아버지 역시 돌배나무처럼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사나이가 되기를 바라셨다.

 

하긴 저 돌배나무가 있었기에 오늘까지 꿋꿋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급격한 가슴의 통증으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참느라 입술을 깨문다. 조금만 있으면 마을에 도착할 텐데 어머니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가슴이 막막했다.

 

“참말로, 이게 누고? 애비 아이가? 이 넘아야, 어서 오그래이.”

 

아들을 얼싸안고 반기는 어머니에게 절을 올린 정명우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방안을 둘러보는 척 일어나 앉는다.

 

“어머니 이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애미한테 무신 그런 말을, 그런데 우째 애비 얼굴이 꼭 아픈 사람 같노? 어디 보자.”

 

어머니는 아들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손부터 잡아보고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니 얼굴이 왜 이 모양이고, 야 좀 보그라, 참말로 모를 일이제? 니 어디가 아픈기가?”

 

“어머니 전 괜찮아요. 어머니는 어떠세요?”

 

“내사 괜찮다. 참, 나 좀 보제. 애비가 배고플 낀데 내가 왜 이러고 앉아 있노.”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향한다.

 

“상 들어올 때까지 좀 누워 있거라. 저녁 묵고 이웃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가제이.”

 

어머니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정명우는 간간히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고통과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어머니의 기척을 살피며 진통제 두 알을 꺼내 꿀꺽 삼킨다. 이제껏 모든 걸 감추고 혼자서만 가슴에 묻고 잘 참아왔었는데 어머니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서울역에서 잘 다녀오라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전송하던 아내의 모습과 작은 손을 흔들어 대던 아들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안 혜 숙-

  1990<문학과의식>에서 중편소설 아버지의 임진강으로 신인상 당선

  1991년 중편소설 저승꽃으로 KBS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강화지부 소설분과 위원장, 문학과 의식 발행인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