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화 사랑꾼, 강화군 의회 박승한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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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강화 사랑꾼, 강화군 의회 박승한 의장

지난 7월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강화군 의회 박승한 신임의장을 찾았다. 박 의장을 처음 대했을 때, 의장 자리가 주는 선입견 탓인지 견고한 철옹성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묵직한 저음에서 나오는 단단한 성문(聲紋)은 거대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곧, 박승한 의장을 공략할 준비를 한 필자는 대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화성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덤비는 양이(洋夷)꼴이 되었다. 이곳저곳을 표적으로 속사포처럼 쏘아 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박 의장에게서 흡사 병인, 신미양요 때 강화를 지키던 양헌수, 어재연 장군의 기백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박승한 의장 특유의 향토애에 침전되기 시작했다. 웬만한 연설이나, 학식에도 끄떡하지 않는 내공을 자부하던 나는 박승한 의장을 접하면서 속으로 경탄하고 있었다. 드넓은 강화 들판의 곳곳을 노니는 박 의장의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찔러왔다. 이 느낌은 뭘까? 최면에 걸린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박 의장에게 함몰되고 있었다. 

 

박 의장은 끝없이 공략해 들어왔다. 박승한 의장은 결코, 강화 곳곳에 설치된 돈대(敦臺)가 아니었다.돈대라기보다 강화가 만들어 낸 ‘광활한 지식의 수렁’이었다. 나의 침윤(浸潤)은 일제 강점기, 조선 최초의 한국 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었던 송남 박두성부터 시작된 박 의장의 ‘강화 예찬론’에 처음부터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박 의장의 강화사랑은 “강화는 유수부(留守府)였다. 유수부는 고려나 조선시대 주요 군사요충지에 설치되어 평상시에도, 군사행정권이 발동되는 행정구역으로 조선시대 개성, 강화, 광주(廣州), 수원 등지에만 설치된 서울 외곽의 핵심 지역이다.”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박 의장의 강화사랑은 어느 덧, 강화 자랑으로 바뀌고 있었다.

 

 예술계 인사부터 사회· 문화계 등 각계를 막론한 저명인사들과 역사적 인물들, 그리고 강화 곳곳의 유적에 대한 예찬론으로 강화군은 파고 또 파고 들어도 끝없는 보고(寶庫)였다. 한마디로, 강화군은 한반도 역사의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쉴 새 없는 강화사랑과 강화자랑에 무너져 내리면서 강화가 한국 종교의 시발지(始發地)라는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사시대 유적인 강화 고인돌, 단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참성단, 고구려 시대 세워진 전등사, 11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낸 교동교회, 한옥 양식의 강화읍 성당 등으로 강화는 각 순례자들의 성지순례지가 되고 있다.

 

아, 박 의장은 어릴 때부터 들어 온 이른바 강화도의 ‘walking encyclopedia(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그 자체였다. 박 의장의 줄줄이 밀려있는 스케줄 때문에 여기서 강화 이야기는 멈추었다. 이참에 공부를 많이 한 후, 다시 ‘강화의 지식백과 인간문화재’ 박승한 의장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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