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인물탐방]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權慄)'장군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탐방

[강화인물탐방]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權慄)'장군

권율장군(문화재청).jpg

<'권율(權慄)'장군 영정과 행주대첩 배치도. (사진=문화재청)>

 

본지에서는 강화군이 배출한 역사 인물들을 취재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 7월의 인물로는 국난에 처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구국의 영웅 권율 장군편이다. 지금 현재, 강화군 선원면에는 권율 장군의 중형(仲兄) 권순(權恂)의 후예로 패시브바이오팜(농업법인) 권국원 회장이 권율장군 생가터 복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불은면 오두리에는 오두정지(鼇頭亭址)가 있는데, 이 오두정지는 선조가 선무1등 공신 권율장군에게 하사한 사패지에 있는 정자로 사위 오성대감 이항복이 상속하였다. 이항복의 호 오성(鰲城)은 자라 오(鰲=鼇)자를 쓰는데 바로 이 지역 오두리(鼇頭里)의 자라 오자다. 권율 장군이 태어난 선원면 출신 유명 인물로는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죽산 조봉암이 있다.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큰 승리)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용장으로 알려진 권율 장군은 1537년 12월 28일 경기도 강화도호부 선원면 연동(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 713번지)에서 태어났다. 권율은 자(字)가 언신(彦愼)이며, 호(號)는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으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권철(權轍)과 창녕 조씨 조승현(曺承晛)의 딸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계는 여말선초의 대유학자이며 조선 개국공신 권근의 직계 후손이며, 모계는 고려조 하성부원군을 지낸 양평공 조익청의 후손이다. 


부계나 모계 모두 여말선초의 명문거족이었다. 권율의 호 만취당은 강화도 선원리에 있던 어머니 조씨의 친정집 당호인 만취당에서 따온 것이다. 권율의 조부 권적(權勣)이 강화부사로 재직하면서, 강화도와 연(緣)을 맺은 권율가(家)는 아버지 권철이 강화도 선원면에서 창녕 조씨 집안의 적선부위 조승현과 사돈관계를 맺고, 권율 4형제를 낳게 된다. 권율은 선조 15년(1582) 46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오늘날의 외교부) 정자(正字, 정9품)가 되었다.


 40여세가 넘도록 백두(白頭/지체는 높으나 벼슬이 없는 사람)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가 권율을 보고, “널, 내가 낳았구나”라며 임종하자, 대오각성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공부를 했다고 한다. 승문원 정자를 거쳐, 전라도 도사(종5품), 예조 정랑, 호조 정랑(정5품), 경성 판관(종5품)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목사로 전격 부임했다. 왜군의 북상으로 한양이 함락되자, 남원으로 물러나 북진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임진년 7월, 충청도 금산의 이치(梨峙)고개와 진안 웅치 고개에서 왜군 주력 부대와 조우하게 된 권율은 동복 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를 맡아 왜군을 대파하게 된다. 


이치 전투는 조선군이 육지에서 처음으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이치 전투의 승리로 전라도가 보전될 수 있었다.한양도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던 권율은 1592년 수원의 독성산성에 주둔하였다. 의병장 조경남(1570~1641)이 쓴 『난중잡록』에 의하면, 10월 하순경에 전투가 벌어졌다. 독성산성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왜군이 독성산으로 들어가는 물을 끊기 위해 지구전을 벌이자, 권율은 성 가장 위에 있는 누각근처에서 수십 마리의 말을 세워 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게 하였다. 


이를 본 왜장 우키다히데이에(字喜多秀家)가 작전이 실패한 것으로 착각하여 물러나자, 이 틈을 기습하여 3천여 명의 왜군을 베었다. 이 때부터 그 누각을 세마대로, 근처, 전철 1호선역을 세마역이라 하여 그 전공을 기리고 있다. 독산성 전투 승리 후, 권율은 행주산성에 입성하여, 남하하는 조·명 연합군과 호응해 왜군이 주둔 중이던 한양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조방장 조경과 승장 처영등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 건너편에 있는 행주 덕양산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경, 조선군의 동향을 주시하던 왜군들은, 권율에게 당한 이치전투와 독산성 전투에서의 치욕을 앙갚음하려고 행주산성에 집결하였다. 하루 종일 총력전을 펼친 왜군은 단 하루만에 1만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김시민의 진주성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기록된 행주대첩은 권율장군이 불과 3천여 명의 병사로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빛나는 항전이었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는 전환점이 되어 한양을 수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는 권율장군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행주대첩의 승리를 치하했다. 1599년 7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날, 권율은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양주골짜기 언덕에 안장되었다. 실록은 도원수 권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身赴難, 戰常陷堅。其梨峙之勝、幸州之捷, 雖古名將, 何以加諸? 國家中興之業, 實賴於

 

전 도원수 권율(權慄)이 졸하였다. 율은 임진년 변란을 당하여 몸을 던져 싸움터에 달려가 전투 때마다 견고한 성을 함락시켰었다. 그 이치(梨峙)의 승리와 행주(幸州)의 대첩(大捷)은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