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신화가 깃든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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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신화가 깃든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

병인양요(丙寅洋擾) 치열했던 격전지 ‘정족산성(鼎足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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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삼랑성 석양 성벽 (사진=강화군청)>

 

강화 삼랑성(江華 三郞城)’정족산성(鼎足山城)’은 같은 곳을 말한다강화도에는 강화 참성단(江華 塹星壇)’을 시작으로 고조선의 첫 임금이자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단군왕검(檀君王儉)’ 신화와 관련된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그중 한 곳이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산(鼎足山)에 있는 고성(古城) ‘삼랑성(三郞城)’이다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해 있어 현재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 부르지만 사적 정식 명칭은 강화 삼랑성(사적 제130)’이다.

 

둘레 약 2,300m에 이르며, 축성된 시기에 대해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으로 각각 제시됐지만 자연활석(잡석雜石)을 이용해 축조된 삼국시대의 석성구조(石城構造)를 보여 주고 있다.

1739(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했고, 1764(영조 40) 다시 성을 중수했다성의 둘레는 2.3km5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정족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산 정상부인 북쪽과 능선 아래로 이어지는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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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삼랑성 (사진=강화군청)>

 

강화도의 성 대부분이 토성인 데 비해 삼랑성은 견고한 석성(石城)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성 주위는 약 2, 높이 2.3m5.30m이다성곽에는 본래 4개의 성문과 누각이 있었는데, 종해루인 남문은 1976년에 중수·복원했고, 현재 전등사 입구인 삼랑성문은 당시의 동문이었다. 나머지 두 문과 종루는 없어지고 성곽만 남아 있다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관방시설인 이곳은 병인양요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기도 하다.

 

성 안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傳燈寺)와 주변에 1259(고종 46)에 궁궐을 지었다고 전하는 고려가궐(高麗假闕) 터가 있는데 조선시대에 강화도가 한양을 방어하는 외곽 기지로 중시되면서, 고려가궐 터에는 정조 때 정족진(鼎足鎭)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설치되기도 했다이후 1866(고종 3)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면서 병인양요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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