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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세월 품은 교동도, 마치 고향 같은 情으로 추억되다<화개산 스카이워크 전망대. (사진=최환금 기자)> 대룡시장에서 맛과 멋을 만끽한 후 올해 4월 개장한 화개산 화개정원과 전망대로 향했다. 화개정원은 1단계 사업인 역사·문화·평화·추억·치유의 5색 테마정원 이후 2단계 사업으로 석가산·물과 폭포·암석원 조성을 완료했다. 무엇보다 화개산 정상의 스카이워크형 전망대가 단연코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한강하구와 서해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북녘 땅에 흐르는 예성강을 따라 펼쳐진 연백평야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특히 모노레일을 통해 정원입구에서 전망대까지 2㎞를 궤도열차로 이동하며, 화개정원의 빼어난 풍광을 조망할 수 있어 더욱 좋다. ■ 화개산 정상 스카이워크형 전망대 최고의 절경 자랑 한국 최초 향교 ‘교동향교’ 900년 시간 그대로 간직 드넓은 저수지옆 10만송이 난정해바라기정원도 장관 <한국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 정문. (사진=최환금 기자)> 이같은 화개정원 조성사업은 향후 계절 수목과 화초를 심고 야간 경관을 더해 수도권 최고의 휴양시설로 조성해 올해 상반기 중 전체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있다. 화개산과 화개사를 거쳐 내려오면 약 900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교동향교를 볼 수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이다. 지난 1980년에 복원돼 1995년 3월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향교는 유교 성현의 위패를 놓고 제사를 지내며, 백성의 교육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지방 교육기관이다. 교통향교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으며,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그리고 내삼문·외삼문·제기고 등이 남아있다. <허물어진 성벽 그대로 보존되는 교동읍성.. (사진=최환금 기자)> 향교를 지나 도로 반대편으로 작은 언덕에 퇴색한 석성(石城)이 눈에 띈다. 교동읍성이다. 둘레 800m 정도의 성벽은 허물어진 모습이지만 일부는 건재하고 성문도 남아 있다. 읍성 남문에 해당하는 홍예문은 누각인 유량류가 없어진 채 남아 있다가 몇 년 전에 복원됐다. 더구나 읍성 안에는 주민이 살고 있다. 그런데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함과 적막함으로 시간 속에 묻어가고 있어 무상함을 더하고 있다. 교동도는 이렇게 수백년의 모습을 담은 그대로 2022년의 시간도 쌓아가고 있다. '시간이 멈춘 섬'이라는 이미지처럼 교동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했다. 물론 도시처럼 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은 없다해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은 교동을 돌아보면서 사라져버렸다. ■ 벽 허물어진 교동읍성, 적막함에 무상함 더하지만 관광지마다 친절함 가득…섬 아닌 정겨운 이웃 느껴져 신나는 여행에 고향집 다녀온 듯한 즐거움으로 남아 <난정해바라기공원의 100만송이 해바라기 모습. 현재는 이용이 불가하다. (사진=최환금 기자)> 대룡시장의 낡은 간판 등 오랜 노포의 모습, 색이 바랜 극장 건물, 허름한 골목길 등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봄직한 풍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지에서 살아본 적이 없음에도 되레 정감이 가고 향수(鄕愁)에 젖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읍성 인근에 있는 남산포를 지나 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난정저수지·난정해바라기정원으로 향했다. 당일 여행의 마지막 코스였지만 읍성에서 거리상으로 가깝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려 했다. 하지만 드넓은 저수지보다 10만송이라는 난정해바라기정원의 장관을 놓치기 싫었다. 읍성에서 7km 정도 거리에 자동차로 10분이내면 도착하나 귀가시간을 감안해 서둘러 출발했다. 난정리를 향해 교동의 들판을 달리면서 주위를 보면 어느덧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드넓고 푸르른 강화 들판이 주는 풍성함에 저절로 힐링이 되면서 감동이 밀려온다. 고요한 섬에서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자유에 가슴이 벅차온다. <난정저수지의 광활한 저수(貯水) 모습. (사진=최환금 기자)> 바닷가에 거의 맞닿은 난정저수지의 광활함이 눈에 들어왔다. 웅장함에 감탄하기도 전에 노란 해바라기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난정해바라기공원의 절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노란 물결의 풍광에 여기저기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관광객들은 잠시 즐기고 가면 되지만 이렇게 드넓은 해바라기 정원의 탄생에는 수많은 난정리 마을 주민들의 수고가 있었다. 강화 교동 난정리 마을 약 3만3000㎡ 부지에 해바라기 정원이 조성된 것은 지난 2017년이다. 난정저수지 인근 공터가 방치되면서 이를 활용하려는 난정리 마을 주민들의 뜻을 모아 시범적으로 해바라기를 심었다. 해바라기는 청정의 자연 속에 둘러싸인 교동도 난정리의 깨끗한 공기와 적당히 불어주는 해풍 그리고 난정리 주민들의 수고로움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광활한 규모의 해바라기를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곳이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위안이 되고 있다는 것과 최북단 고요한 섬의 '노란 정원'에 담겨 있는 순수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주민들은 기꺼이 수고에 나선다. <평화의섬 교동 어서오시겨 사투리가 정겹다. (사진=최환금 기자)> 교동도를 한바퀴 돌아 나오면서 섬 전체로 연결된 자동차 일주도로가 없어 수고를 더해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약 4km 정도의 자전거 일주도로는 조성돼 있어 라이더라면 누구나 반나절이면 교동도를 일주할 수 있다. 차량으로도 중간중간 관광지인 제비집·대룡시장·화개정원·난정해바라기정원 등 곳곳에서 만난 주민들의 친절함은 너무 좋았다.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섬 전체에서 푸근함을 느꼈다. 이런 기억은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치 고향을 다녀온 듯한 즐거움으로 오랫동안 추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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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어서오시겨’…강화 사투리에는 정겨움이 있다<전통시장에서는 사투리가 많이 쓰여진다.(사진은 기사 특정사실과 무관함/사진=최환금 기자)> 강화도에 처음 가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뚝뚝한 말투에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화 고유 사투리이기 때문이다. 듣기에는 투박한 느낌을 받지만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다정하고 정감이 가는 어감을 느끼게 된다. 강화 사람들은 일상에서 자연스레 느끼는 사투리지만 외지인들은 모를 때는 불쾌할 수 있지만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정겨운 강화 사투리에 대해 소개한다./편집자 주 인천 사람이 모르는 인천 사투리가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인천이 아닌 강화도 말이다. 강화도는 지난 1995년 3월 1일을 기해 경기도에서 인천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됐다. 당시 강화군은 함께 편입된 김포 일부와 옹진을 합쳐 954㎢의 면적과 인구 235만 명의 거대 광역시의 한 지역이 됐다. 그렇지만 강화도는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자체 향토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이다. 처음 듣는 사투리가 많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물론 지역별로 사투리가 존재한다. 알다시피 사투리는 어느 한 지역에서만 쓰는 말로, 표준어가 아닌 말을 뜻한다. 그런데 경상도·전라도 사투리나 북한 사투리는 TV 방송 등에서 많이 인용돼 어색하지 않다. 하물면 강원·제주 사투리까지도 낯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강화도 사투리는 들어본 적이 별로 없어 생경스럽다. ■‘~시꺄’ 등 상대적 된발음에 듣기에는 투박한 느낌 대룡시장, 황해 연백군 피난민 정착… 북한말투 비슷 오해 소지 불구 정감이 가는 어감에 알수록 친근감 <(자료=올어바웃인천)> 강화도에서는 인사말부터 다르다. 흔히 하는인사말로 표준에서 -세요, -시오로 끝나는 어미에서는 -시겨라는 말을 쓴다. 어서오세요는 어서오시겨, 안녕히 계세요는 안녕히 계시겨로 한다. 상대에 대해 확인하고자 할 때에는 -시갸, -시꺄를 자주 사용한다. 실례로 안녕하세요? 할 땐 안녕하시꺄, 계십니까?는 계시꺄라고 한다. 말투가 된발음이라서 다소 오해 소지가 있지만 사투리이기에 듣기에 따라 다르다. 호칭에서도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를 흔히 아부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라는 호칭이 뭔가 근엄한 무게감이 있어서 친근하게 아부지로 대신 부르는 경우로 생각했다. 지금의 아이들이 아버지 대신 아빠로 부르는 것처럼 어렸을 때는 당연히 아부지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역시 강화도 사투리이다. 아버지는 아부지, 어머니는 어머이로 불렀다. 당연히 할아버지는 할아부지, 할머니는 할머이였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는 또 다르다. 외할아버지는 외할아부지로 부를 것 같았는데 오자라버지로 부른다. 그리고 외할머니를 오잘머니, 외삼촌은 오삼촌이라고 한다. 사실 강화도가 경기, 인천, 서울과 인접한 곳이라 이들 지역에서도 이런 호칭을 사투리로 생각치 않고 일반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강화도 사투리는 은근히 받침을 탈락하는 동사가 많다. 대표적으로 -갑시다, -합니다가 있다. 갑시다는 갑의 ㅂ이 탈락돼 -가이다, 합니다는 합의 ㅂ이 탈락돼 -하이다'가 된다. 단어 및 형용사에서도 표현이 다른다. 심부름을 강화도에서는 심바람이라고 하며, 찬물을 쏜물, 추운날을을 쏜날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제주도 사투리는 일반인이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이다. 강화도 사투리도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단어를 사용한 예로 "안녕하세요? 어디가세요?" "아버지 심부름으로 시장에 갑니다"라는 대화는 강화도 사투리로 "안녕하시꺄? 어디가시꺄?" "아부지 심바람을 시장에 가이다"가 된다. 역시 한 번에 알아듣기 쉽지 않은 말이다. 이밖에도 무는 무이, 했습니다는 했시다, 똑같지 않게는 깔죽읍시, 못난 짓은 더럽다, 넣어 먹어라는 처 먹어라, 끈적끈적은 뿌진뿌진 등 표준어와 많이 다르다. 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강화도 특히 인근의 교동도는 북한 황해도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다. 상권도 황해도 연안장이나 배천, 해주쪽과 연계성이 많고 혼인 풍습도 북쪽과 연계성이 컸다. 전쟁으로 북한에서 피난온 연백군 주민들이 귀향하지 못하고 교동도에 정착하면서 남과 북의 문화과 혼재하게 됐다. 말투 역시 북한말로 오해받을 정도로 유사하다. 이후 교동도는 그들의 오랜 문화와 1960~1970년대 스타일이 머물러 있는 '레트로'를 느낄 수 있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북한과 인접한 접경지로서 교동도 주민들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강화도 주민들의 정겨운 사투리도 이어가고 있다. 경제발전에 따라 지방이 도시화가 되면서 언어도 자연스레 표준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만큼 사투리의 사용 빈도가 적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투리가 되레 생소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강화도는 일반적인 변화와는 차이가 있다. 육지에 속하지 않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감안해도 생활 면면에 적지 않은 다름이 있다. 강화도가 인천광역시 지역으로 된지 어느덧 만 27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처럼 강산이 두세번 변할 수 있는 기간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투리는 면면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료=강화군)>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다. 인천 역시 사투리가 있을 수 있다. 검색사이트를 동원해 인천 사투리를 찾아보니 없는 것은 아니다. 못생긴 생선으로 알려진 아귀를 인천에서는 물텀벙이로 말한다. 다양한 야채를 양념에 버무린 무생채를 인천에서는 채장아찌로, 생선 알탕이 아닌 계란이 되기 전의 어린 알로 만든 알탕은 닭알탕으로 부른다. 또한 계란은 겨란, 닭알이라고 한다. 단어 몇개를 나열하면서 굳이 인천 사투리라고 표현하기는 어색하다. 그렇기에 말투로 쓰이는 사투리, 즉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본래의 인천 사투리 여부는 알 수 없다. 강화도 사투리를 인천 사투리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오랜 세월이 경과하게 되면 강화도 지역이 인천으로 편입된 것처럼 사투리도 인천의 사투리로 자리매김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투리에는 지역적 특성이 담겨 있다. 행정 지역은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어도 생활 속 사투리는 강화 고유의 말로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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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강화섬포도축제 화보<3년만에 다시 열린 '강화섬포도축제' 행사장에 설치된 포도지킴이 팻말이 의미를 더한다. (사진=최환금 기자)> 강화도는 포도 재배에 있어 천혜의 자연환경과 해풍, 긴 일조량, 큰 일교차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같은 최적의 생육환경에 고도의 재배기술이 더해져 맛과 향이 뛰어나다. 일반적인 캠벨 어리 포도의 당도는 보통 14˚BX(브릭스) 정도인데 비해 강화섬포도의 당도는 18˚BX 이상으로 다디달다. 강화군은 맛과 향이 뛰어난 강화포도의 특성을 살리고 차별화를 위해 브랜드 명을 강화섬포 도로 결정하고 지역 특산물 축제로 매년 강화섬포도 축제를 열고 있다. 이 행사는 포도 외에도 강화 특산물이 한 자리에 모여 농업인과 소비자가 함께 어울리는 화합의 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유명가수 공연과 주민노래자랑, 체험행사 등으로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주말을 맞아 큰 호응 속에 열린 '제2회 강화섬포도축제'의 이모저모를 화보로 소개한다. 제2회 강화섬포도축제가 지난 17~18일 이틀간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광장에서 강화군농업기술센터 주최와 강화섬포도축제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다. 첫날 포도버 스킹 등의 무대행사에 이어 식전공연과 개막식, 박군과 강혜연 출연으로 분위기를 돋운 축하공연이 진행됐다. 이튿날은 포통령선거·포도가요제(주민노래자랑) 등이 이어졌다. 한편, 포도밟기 등의 체험행사는 행사일 오후 내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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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강화문화재 야행(夜行)’ 열린다강화군(군수 유천호)이 오는 23일, 24일 ‘2022년도 강화문화재야행(夜行)’을 개최한다. 강화문화재야행은 강화읍 원도심 문화재의 소중한 가치를 함께 공유하는 야간문화축제이다. 축제는 23일과 24일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강화읍 용흥궁 공원 일원에서 진행한다. 별빛달빛 야행빛, 야행마차, AR고려궁지 체험, 성공회 강화성당 음악회, 강화 저잣거리, 체험 프로그램 등으로 고려의 밤을 즐길 수 있다. 23일 개막공연에는 지역주민과 강화초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칠선녀 성무, 가수 린, 장윤정 등이 출연해 공연을 펼친다. 24일에는 초․중학교생이 참여하는 ‘도전! 고려 벨’, 가수 윤정렬․위드․하나연이 출연하는 ‘음악 콘서트’, 역사강사 최태성의 ‘토크 콘서트’가 공연된다. 이 외에도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하는 ‘원도심 도보여행’와 ‘야행마차’로 원도심 문화재의 야간경관을 설명과 함께 즐길 수 있다. 또한, 방문객이 직접 참여하는 AR모바일 게임, 강화화문석체험, 클래식 음악회, 풍선 마술쇼, 저글링 쇼 등 풍성한 체험프로그램으로 즐거움을 더했다. 유천호 군수는 “올해 강화문화재야행(夜行)은 거리두기가 완화된 이후에 처음 개최되는 강화군의 대표 축제인 만큼 더욱 풍성하게 준비했다”며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고려의 밤을 품은 문화재를 마음껏 즐겨보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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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웃음...강화섬포도축제 3년만에 '활짝'강화군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중단됐던 '강화섬포도축제'가 3년 만에 다시 개최했다. 초지대교 앞 초지 광장에서 17일~18일 2일간 진행된 이번 '제2회 강화섬포도축제'는 농업인과 소비자가 함께 어울리며 포도의 맛과 향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진행됐다. 이번 축제에서 선보인 강화섬포도는 거센 해풍을 맞고 성장한 포도로써, 17~18˚BX 의 높은 당도를 유지해 달콤하고 싱그러운 맛과 향이 뛰어나다. 일반적인 캠벌얼리 포도의 당도는 보통 14˚BX 정도이다. 무엇보다 포도에서 풍기는 향이 풍부하고 껍질째 먹어도 식감이 좋아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해 운반과 저장에서도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는 특성이 있다. <포도 페이스페인팅을 하는 아이. (사진=송세용 기자)> 이번 강화섬포도축제 행사장에서는 포도따기, 포도 맷돌쥬스나 포도주 만들기, 포도밟기 등 포도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돼 즐거움을 더했다. 포도밭에서 수확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포도따기 체험은 신청자가 몰려 사전예약제로 진행됐다. 또한 포도 낚시 등 체험행사는 농업인과 소비자가 함께 어울려 화합의 한마당이 됐으며, 버스킹 공연·깜짝 이벤트·먹거리 장터 등으로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했다. <강화섬포도 축제를 축하하는 유천호 군수. (사진=강화군)> 유천호 강화군수는 "청정지역에서 자란 강화섬포도는 당도와 산도가 어우러져 전국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며 "축제를 통해 탐스럽게 무르익은 포도의 맛과 향을 느끼며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강화에서는 본격적인 포도 출하 시기를 맞아 강화도 주요 도로변과 포도농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직거래 판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인근 포도농장에서 바로 따온 싱싱하고 달콤한 포도를 직접 맛보고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 이용객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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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강화 고인돌 선사체험’ 재개<강화 고인돌탐방대. (사진=강화군)>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문화유산 향유 프로그램 ‘강화 고인돌 선사체험’을 오는 17일부터 재개한다. ‘강화 고인돌 선사체험’은 문화재청 세계유산 활용 공모사업으로 인류의 자산인 세계유산의 고유한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함께 공유하며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프로그램이다. 가족단위로 고인돌 탐방대가 되어, 부근리 고인돌을 탐방하며 사냥체험, 제례의식, 고인돌 축조 등 선사체험을 생생하게 즐길 수 있다. 또한, 토기, 장신구, 모형 움집 만들기, 유물 발굴, 어로, 탁본 체험, 세계유산 사진전 등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번 행사는 오는 9월 17일부터 10월 16일까지, 매주 토·일요일 10시부터 16시까지 진행되며, 예약 없이 누구나 현장에서 참여할 수 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네이버 카페 ‘강화고인돌’(https://cafe.naver.com/dolbus) 또는 ‘우리문화재보호회’로 문의하면 된다. 군 관계자는 “어린이들이 선선한 가을 날씨에 선사시대를 경험하고,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며 “아이들과 함께 더욱 풍성하고 특별한 볼거리를 마련한 강화 고인돌로 나들이 오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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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시간이 머물러 있는 섬… 그곳에는 자유 그리고 그리움이 있다<교동도 관광안내 지도. (사진=강화군청)> 강화 ‘교동도’. 행정구역으로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이다.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지만 교동면 북부 해안선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이다. 따라서 교동 서북부쪽은 휴전선 너머에 북한 황해도 연안군·배천군과 마주보고 있다. 이처럼 교동도는 북한과의 거리가 2.6km에 불과한 접경지역으로,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모여 삶의 터전으로 지내고 있는 섬이다. 오랜 시간 도시화가 늦어진 도서(島嶼)지역으로 '시간이 멈춘 섬'의 이미지가 남아 있다. 2014년 교동대교 개통을 계기로 거듭난 교동도가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함께 최신 ICT기술 기반의 다양한 관광 콘텐츠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평화와 통일의 상징'이며 '시간이 멈춘' 레트로 감성의 교동도를 추석 연휴 중 하루여행 개념으로 다녀올 수 있도록 간략히 소개한다. / 편집자 주 <교동대교 모습. (사진=최환금 기자)> 교동도는 강화도에서 한참을 지나 대한민국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마치 가보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가는 듯한 긴장과 기대감에 불안과 설렘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부터 민북지역, 검문에 협조 바랍니다' 교동대교 입구에 적힌 안내문부터 긴장감을 더했다. 교동도는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출입신청서를 작성한 후 차량출입증을 받아야 갈 수 있는 곳이다. 해병대 검문을 통해 교동대교를 건넜다. <고구저수지 전경. (사진=최환금 기자)> 교동대교를 건너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볼거리는 고구저수지이다. 특별한 풍경보다 고구낚시터 이용객이 주가 되는 저수지로, 연꽃이 드넓게 분포돼 있어 여름이면 절경을 이룬다. 저수지 중앙에 정자와 나무데크가 있어 나름의 풍경을 보여주지만 저수지를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없어 허전함이 있다. 그저 주변에서 저수지 전체와 저수지 앞의 작은 습지에 가득한 연꽃을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다. <교동제비집(왼쪽)과 2층 전시실 모습. (사진=최환금 기자)> 고구저수지를 지나면 갈림길 앞에 교동관광안내소(웰컴센터) 역할을 하는 교동제비집이 있다. 교동도에는 유독 제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제비를 흔히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교동도 가옥에는 처마 밑에 제비집이 제법 남아 있다. 실향민들은 제비를 보고 그리운 고향에서 온 귀한 손님이라 부르며 소중히 다뤘다. 이에 강화군에서는 그들의 특별한 애정이 담긴 제비집을 관광산업으로 육성해 미래를 향한 도약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교동제비집은 2층 건물로 1층에서 교동신문 만들기를 할 수 있다. 플렛폼에서 교동도의 명소·역사 등을 골라서 기사에 넣고 기념사진을 찍어 넣으면 신문이 완성된다. 제작한 교동신문은 이메일로 받아 볼 수 있다. 보기만 한 신문을 직접 만들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룡시장에는 레트로 감성이 가득하다. (사진=최환금 기자)> 이후 교동도에서 유명한 대룡시장으로 향했다. '어서오시겨'라고 강화 사투리로 써진 대룡시장 출입구의 큰 간판이 정겨움을 선사한다. 대룡시장 골목 양켠에 식당 등 먹을 곳이 즐비하다. 다양한 먹거리에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즐겁고 행복한 고민이다. 대룡시장은 지난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된 이후 TV 프로그램 등의 촬영지로 소개되면서 관광명소로 유명세를 얻게 됐다. 글에서 거듭 강조한 것처럼 교동도의 시간이 멈춘 듯한 이미지, 이른바 레트로 감성의 모습은 많은 도시 사람들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상기(上記)한 낡은 간판의 노포나 색이 바랜 극장 건물 등은 마치 1960년대를 배경으로 구성한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졌다. 골목 곳곳에 그려진 벽화나 오래된 건물들이 복고풍의 느낌을 더해준다. 시장 상인들이 개발을 게을리해 옛 모습이 지속된 것이 아니다. 교동도 지역이 군사구역으로 묶이면서 오랜 세월동안 외지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결국 현지 생활이 유지된 것이다. 이로 인해 대룡시장은 골목 생김새나 상점의 간판 등이 모두 그 시절 그대로 남아 있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대룡시장은 본래 한국전쟁 당시 북한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온 실향민들이 생계 유지 위해 만든 시장이 시초이다. 고향에 있는 시장인 연백장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든 골목시장으로, 오래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실향민들에게는 향수를, 외지인들에게는 레트로 감성을 느끼게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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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차례상 차리기·차례 제대로 지내는 방법시대가 변함에 따라 많은 것도 변해간다. 여행을 가거나 하는 등의 명절을 보내는가 하면 아직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차례(茶禮)를 지낸다. 차례나 제사는 매년 같은 방법을 되풀이 하지만 집안 큰 어르신이 안 계실 경우 항상 헷갈리는 것이 차례상 차리기와 차례 지내는 방법이다. 최근 유교 전통문화를 보존해온 성균관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 간소화 방안을 담은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했다. 성균관이 발표한 ‘차례상 표준안’에 따르면, 추석 차례상의 기본 음식은 송편, 나물, 구이(적ㆍ炙), 김치, 과일, 술 등 6가지다. 여기에 육류, 생선, 떡을 포함해 최대 9개면 족하다. 성균관측은 “예의 근본정신을 다룬 유학 경전 '예기(禮記)'의 '악기(樂記)'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대례필간ㆍ大禮必簡)고 한다”며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음식의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성균관측은 또,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을 차례상에 올릴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기름진 음식에 대한 기록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사계전서' 제41권 의례문해에 나온다. 밀과나 유병 등 기름진 음식을 써서 제사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했다고 성균관 측은 소개했다. 또, 그동안 차례상을 바르게 차리는 예법처럼 여겨왔던 '홍동백서(紅東白西ㆍ붉은 음식은 동쪽, 흰 음식은 서쪽)', '조율이시(棗栗梨枾ㆍ대추, 밤, 배, 감)는 예법 관련 옛 문헌에는 없는 표현으로, 상을 차릴 때 음식을 편하게 놓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차례(茶禮)는 가례(家禮)라고도 한다. 즉,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집안 형편이나 가풍에 따라 지내면 된다는 뜻이다. 다음은 옛 문헌 등을 참고해 차례상 차리는 방법과 차례를 지내는 방법이다. 이를 참고해 형편에 맞게 지내면 된다. ▣ 차례상 차리기 <추석 차례상 표준안 진설도.(사진=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제공)> 차례상 차리기는 공통적인 법칙을 따르는데 모두가 알고 있는 홍동백서(紅東白西ㆍ붉은 음식은 동쪽, 흰 음식은 서쪽), 어동육서(魚東肉西ㆍ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조율이시(棗栗梨柿ㆍ대추, 밤, 배, 감), 좌포우혜(左脯右醯ㆍ포는 왼쪽, 식혜는 우측), 두동미서(頭東尾西ㆍ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가 항상 등장하며 ‘치’자로 끝나는 생선과 복숭아는 차례상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 향이 강한 마늘과 붉은 색인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정도가 기본이다. 이들은 무엇에 기반을 두고 생겨난 것인지에 따른 의견은 분분하지만 음식의 위치에 대해서는 동양오행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음양오행에서 양(陽)은 동쪽을 상징하며 색으로는 붉은색이다. 반대로 음(陰)은 서쪽을 상징하며 색으로는 흰색을 뜻한다. 이래서 생긴 것이 홍동백서다. 또, 물은 양을 상징하고 땅은 음을 상징하므로 물고기는 동쪽, 육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조율이시(대추, 밤, 배, 감)는 조선시대 관직과 관련이 있다. 씨앗이 하나인 대추는 임금을, 한 송이에 세 톨이 들은 밤은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씨가 여섯 개인 배는 이 호 예 병 형 공 육조를 씨가 여덟 개인 감은 우리나라 팔도를 상징한다. 마늘과 고춧가루는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어 사용하지 않으며, ‘치’자로 끝나는 생선은 저급(低級)한 생선으로 생각해 좋은 음식을 올려야 하는 차례상에서는 빠졌다. 그렇다면 차례상에 올려야 하는 음식과 위치는 정해져 있을까. 성균관 자료에 따르면, 문공가례와 제의초, 사례편람, 국조오례 등 예서에는 정확한 음식의 종류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과일의 위치도 정확하게 명시해 놓지 않고 있다. 단지 면(麵ㆍ국수), 육(肉ㆍ고기), 적(炙ㆍ구운고기), 어(魚ㆍ생선), 병(餠ㆍ떡), 탕(湯ㆍ국), 포(脯ㆍ말린 고기 또는 말린 과일), 숙채(熟菜ㆍ익힌 채소), 청장(淸醬(진하지 않은 간장), 해(醢ㆍ젓갈), 식해(食醢ㆍ삭힌 음식), 침채(沈菜ㆍ김치), 과(果ㆍ과일)만 등장한다. 특히, 예전에는 지금과 같이 지역별 교류와 냉장시설 등이 좋지 않았기에 각 지역별 특산물을 올리는 예가 많았다. 한편, 격몽요결(四礼便览ㆍ율곡 이이) 제례장(祭禮章) 제칠(第七)에서 이이 선생님은 ‘무릇 제사는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을 뿐이다. 가난하면 가산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 할 것이요, 병이 있으면 근력을 헤아려 치르되, 재물과 힘이 미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예법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凡祭 主於盡愛敬之誠而已 貧則稱家之有無 疾則量筋力而行之 財力可及者 自當如儀)’라면서 형편에 맞게 차례를 지낼 것을 권하고 있다. ▣ 차례 지내는 방법 <율곡이이의 '격몽요결'시제 진설도에 준해 구성된 차례상 차림.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차례는 가례라 해서 지내는 방법 또한 지역별 또는 각 가정별로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예칙이 있다. 성균관 자료에 따르면, 제사는 단위진설(單位陳設ㆍ기일에 해당되는 분만 진설)과 양위진설(兩位陳設ㆍ기일에 해당되는 분 이외에 배우자도 함께 진설)이 있고 양위진설에도 고비각설(考妣各設)과 고비합설(考妣合設)이 있으나 차례에는 조상님께 음식을 봉양하는 것이기에 이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차례는? 예전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명절에 지냈는데 지금은 대개 설, 추석 등의 명절날에만 지낸다고 한다. 차례는 돌아가신 조상 가운데 자신으로부터 4대(고조)까지 해당하며 5대 이상은 시제의 대상이 된다. 장소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 있을 때는 사당에서 지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대개 대청이나 큰 방에서 지내지만 가옥의 구조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차례 지내는 방법은 국립민속박물관 자료를 참고했다. 차례를 지내려면 3일 전부터 목욕재계해 심신을 청결히 해야 하고, 차례 당일 아침에는 사당과 제청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집안의 안주인을 중심으로 탕, 떡, 부침 등의 차례 음식을 준비하고, 남자들은 축문, 지방, 꼬치, 제기 등 차례에 필요한 기구들을 준비하는가 하면 고기, 과일 등 차례음식을 장만한다. 차례를 지내는 시간이 되면 제상과 병풍 등 집기를 준비한다. 차례는 기제사와 달리 축문을 읽지 않고 잔을 한 번만 올린다. 이에 반해 기제사는 술을 세 번 올리고, 축을 읽는 것이 크게 다르다. 진설(陳設) : 차례상에 음식을 차린다는 의미로 술잔, 수저, 실과 등 식지 않는 음식을 차린다. 차례는 기제사로 모시는 4대의 조상 모두를 한 자리에 모시고 지내는 제례이므로 대수별로 별도의 상에 따로따로 차려야 한다. 그러나 차례상이 부족할 경우 한 상에 차리되 각기 구분해야 한다. 출주(出主) : 사당이 있는 집에서는 사당에서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이 절차가 필요 없다. 그러나 지방으로 모실 경우에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지방을 모두 작성해 모신다. 강신(降神) :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조상님의 신이 차례를 지내는 장소로 오시라는 의미이다. 주인이 향상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집사자가 따라주는 술을 세 번으로 나누어 모시기에 붓고 두 번 절한다. 참신(參神) : 신위에게 인사를 드리는 절차이다. 이때 신주를 모시고 차례를 지낼 경우에는 강신을 하기 전에 신주를 모시고 나서 바로 참신을 하고, 지방으로 모실 경우에는 강신을 하고 참신을 한다. 제주 이하 참석한 모든 가족이 절을 하는데, 음양의 원리에 따라 남자는 두 번, 여자는 네 번 절한다. 진찬(進饌) : 진설에서 차리지 않은 나머지 차례음식으로서 식어서는 안 될 음식을 차린다. 헌작(獻酌) : 제주가 신위에 잔을 올리는 절차이다. 4대의 조상을 모시는 제례이므로 각 신위에 따로 잔을 올려야 한다. 계반삽시(啓飯揷匙) : 메의 뚜껑을 열어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은 적이나 편에 올려놓는 절차로 삽시정저(揷匙正著)라고도 한다. 추석 때에는 젓가락을 송편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설에는 떡국을 올린다. 합문(闔門) : 조상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참사자들은 제청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거나, 제상 앞에 병풍을 가린 후 모두 엎드린다. 계문(啓門) : 4~5분 후 연장자가 기침을 세 번 하면, 전원이 제청 안으로 들어오거나, 병풍을 걷고 일어선다. 철시복반(撤匙復飯) : 수저를 거두고, 메의 뚜껑을 덮는 절차로 추석 차례에서는 젓가락을 내린다. 사신(辭神) : 참사자들이 절을 해 모셔왔던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이다. 이때도 남자는 두 번, 여자는 네 번 절한다. 납주(納主) : 신주를 원래의 자리인 사당 감실에 모신다. 지방을 모셨을 경우 지방을 향로 위에 놓고 태운다. 철상(撤床) : 진설한 차례음식을 거두어 내리고 차례상 등의 기물을 정리한다. 음복(飮福) : 주인과 참사자들이 음복주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조상의 덕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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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한국관광공사, "고려궁지" 모바일 게임 ‘시간의 흔적을 찾아서’ 출시강화군(군수 유천호)이 한국관광공사 경인지사(지사장 김배호)와 함께 모바일 게임 여행상품 ‘얼라이브(Alive) 강화Ⅱ(고려궁지, 시간의 흔적을 찾아서)’를 출시했다. ‘얼라이브(Alive) 강화Ⅱ(고려궁지, 시간의 흔적을 찾아서)’는 ‘강화 고려궁지’의 역사적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형 모바일 미션 게임이다. 강화동종 캐릭터의 안내로 고려궁지에서 고려와 조선의 흔적을 찾고 주어진 6가지 임무를 완수하면 특별한 이벤트 영상을 볼 수 있다. 미션을 수행한 관광객에게는 원도심 한옥관광안내소(강화읍 남산길 14-1)에서 소정의 기념품을 지급한다. ‘강화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해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겨 38년간 사용한 궁궐터다. 지금은 조선의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병인양요 때 전소된 외규장각이 복원되어 있다. 고려궁지를 중심으로 성공회 강화성당, 조양방직, 미래체험관, 소창체험관 등 골목길로 이어져 있다. 여행객들은 고려궁지에서 이어지는 골목 사이사이를 걸으며 고려시대부터 1960~70년대 산업화기에 이르는 천년에 이르는 강화의 숨겨진 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 해당 게임은 플레이스토어(안드로이드) 또는 앱스토어(iOS)에서 "조인나우"를 설치해 회원가입을 하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고려궁지, 시간의 흔적을 찾아서"는 GPS 기반으로 고려궁지 내부나 인근에서만 게임이 가능하다. 군 관계자는 “이번 추석 연휴에 가족과 함께 새롭게 출시한 ‘Alive 강화Ⅱ(고려궁지, 시간의 흔적을 찾아서)’의 미션에도 참여하고, 원도심 도보여행도 즐겨주시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강화군의 원도심 연계 관광 활성화와 지역 내 소비 증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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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인물탐방] 조선 최연소 과거 합격자 이건창<옹진 이건창 영세불망비. (사진=송세용 기자)>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평균 연령은 36.7세다. 구도장원공으로 이름난 율곡 이이도 29세가 되어, 대과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강화출신 이건창은 만14세가 되던 1866년(고종 30년) 과거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가 탄생한 것이다. 이건창은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부친 이상학은 부인 파평 윤씨 사이에 3남1녀를 낳았다. 첫째가 이건창, 둘째가 이건승, 셋째가 이건면이다. 그의 가문은 17세기 병조참판을 지낸 이대성(1651~1718) 이후, 소론가문이었기 때문에 크게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건창의 고조부 이충익은 손자 이시원이 대과에 급제한 것을 보고도 반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대가 당론의 화(黨論의 禍)를 입어 멸문했던 바, 가문의 전통은 독서하여 고식지행(高識知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조부 이시원은 영재가 15세 되던 해 1866(고종 3년) 병인양요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음독 순절을 하였다. 이를 기려 조정에서는 이시원의 충절을 기리고 강화도(江華島)민을 위로하기 위해 별시(別試)를 열었다. 이건창은 별시에 응시 15세의 어린 나이로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각종 기록에는 이건창이 개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었으나, 가승(家乘)에는 강화에서 태어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이건창 선대가 강화에 정착한 것은 고조부 이충익 때부터였다. 이건창의 과거 15세 합격은 조선왕조 최연소 합격의 진기록이다. 출사하기에는 너무 어려, 4년 후, 건창의 나이 18세가 되어 홍문관직에 보해졌다. 한편, 과거 합격이후, 벼슬 길에 나아가기까지, 건창은 고시문(古詩文)을 읽기 시작하였고, 전국에서 찾아 온 서생(書生) 김택영, 강위, 황현, 이원팔, 여사원 등과 깊은 친교를 맺었다. 1873년 22세에 한림학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23세 되던 1874년 세폐사(歲幣使) 일행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가서 청국의 한림학사 황옥(黃鈺), 서부(徐郙), 張家驤(장가양) 등과 글을 주고받았는데, 이들은 영재의 학문, 문장, 인격에 탄복하였다.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시, 이건창은 ‘청국은 외국지국(外國之柩)이요, 이홍장(李鴻章)은 거간꾼이라’고 비난한 것을 계기로 개화파 김옥균, 어윤중 등과 일본의 성장에 대하여 교류(交流)하였다. 1877년 호남우도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당시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학정의 죄를 물어 파면시켰으나, 민규호와 조병식의 무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1879년 유배에서 풀려 난 이건창은 개화파의 김홍집, 홍영식, 박영효 등과 접촉하여,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을 토론한 결과, 『조선책략』은 망국적 정책이라는 척사상소(斥邪上疏)를 올리며 개화파와 결별하였다. <이건창 생가터. (사진=송세용)> 1882년(고종 19),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적발하고, 농민들을 구휼하는데 앞장서며,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6월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대원군이 청에 유폐되자 김윤식, 어윤중 등이 이건창을 개화파로 포섭하려 하였으나, 이건창은 이를 거부하였다. 1884년 모친상, 1888년 부친상을 치르며, 쇠약해진 몸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 강화에 퇴거하여 『당의통락』을 저술하였다. 1891년 한성부소윤(=서윤. 오늘날의 서울시 내무국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한성의 가옥이나 토지를 매입하는데 격분, 국법을 마련하여 백성들이 집과 토지를 외국인에게 매매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실시할 것을 상소하였다. 1892년, 함흥 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되어 관찰사의 죄상을 밝혀 파면시켰다. 1893년(고종 30년) 승지에 제수되어 매직관리들을 탄핵하였다가,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고 보성으로 유배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법무협판(法務協辦), 경연시강(경연시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정원하, 홍승헌 등과 함께 ‘請討復疏(청토복소)’를 올렸다.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이때 “해주관찰사냐? 귀양이냐?”는 고종의 하문에 유배 길을 택한 것은 그의 청수(淸秀)하고 강직한 성정(性情)을 잘 드러내 준다. 유백에서 풀려나 강화 화도면 사기리(沙磯里)로 은거한 이건창은 1898년 6월 18일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곧고 강직한 성품은 누대를 거쳐 내려온 소론 집안 가풍의 영향을 받아 직언척양(直言斥洋)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대쪽 같은 성정이 불후의 명저 『당의통략(黨議通略)』를 낳았다. 『당의통락』은 파당과 문벌을 초월해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조선시대 당쟁사 연구의 역작으로 남아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자서(自序), 두 번째 부분은 1575년(선조 8)부터 1755년(영조 31)까지 선조부터, 영조까지 기사본말체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원론(原論)으로 조선 당쟁의 원인을 열거하고 있다. 도학의 중함, 명의의 준엄, 문사의 자잘함, 형옥의 엄밀함, 대각의 준엄, 관직이 청정, 문벌의 성대, 승평의 장구함 등 여덟 가지를 들고 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은 종제(從弟) 이건방의 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