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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의 역사, 문화가 있는 강화강화역사이야기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우리사회와 문화변동의 풍파를 피할 수 없이 그대로 겪어온 강화역사의 아로새겨진 자취를 사실 그대로 담아내어 우리 후손에게 소중한 문화적 가치로 전승하여 강화인의 굳건한 의지와 정신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강화 지명의 시작 ● ≪삼국사기≫ 제37권에 의하면 강화를 '혈구군'또는 '갑비고차'라고 했으며 고구려에 속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다시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이름을 바꿔 해구군으로 개칭하였으며, '강화'라는 이름은 고려태조(서기 940)에 이르러 강화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고종때(서기 1232) 강화군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에, 교동군을 강화군으로 편입하였고(1914년), 1995년도에 비로소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강화역사이야기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우리사회와 문화변동의 풍파를 피할 수 없이 그대로 겪어온 강화역사의 아로새겨진 자취를 사실 그대로 담아내어 우리 후손에게 소중한 문화적 가치로 전승하여 강화인의 굳건한 의지와 정신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1 강화산성 분류 : 문화재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2 소재지 : (23028)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숙종 때 전면적으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락천 건너 남산까지 포함시켜 크게 확대하였다. 북산, 남산, 견자산으로 이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7,122m이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暗門), 2개의 수문(水門)이 있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다. 장인대(丈人臺)라고도 불린 남장대는 1745년(영조 21) 강화유수 황경원이 세웠는데, 2010년에 복원되었다. 4대문 가운데 북문에는 원래 누각이 없었는데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올려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남문은 1955년에 문루가 무너졌는데 1975년에 복원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江都南門’ 편액을 썼다. 2003년 동문이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성문이 복원됐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성의 동쪽 부분은 많이 없어졌으나, 남쪽, 북쪽과 서쪽의 산자락 부분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들어왔고,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참고문헌]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강화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2007. 강화군·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강화군·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강화군·인하대 박물관, 『강화산성 동문지 주변 도로개설구간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2002. 한울문화재연구원·강화군, 『강화산성 남장대지 유적』, 2011. <자료제공 : 강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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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라 강화유서깊은 강화는 고려가 숨 쉬던 천녀고도 우뚝 솟은 마니산 정상 강화는 검푸른 물결 바다위 무역선!! 평화롭게 갈매기를 벗 삼아 오고가네!! 그 옛날 숫한 "찬탈자,이리떼 처럼 달려 들던곳, 생각난다. 신미양요 1871년 아직도 포성이 쟁쟁하네, 어재연장군 충신 간데없으니!! 이제는 천년보배 길이, 빛나리니 그이름, 강화! 마니산 정상에서 저 하늘 맑은 푸르름이여! 시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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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 강화군 교통 문제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서울 출근길> 출·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길게 늘어서는 차량들의 행렬… 수도권이라면 어디서든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현상들을 우리는 일상처럼 당연 하듯 감내(堪耐)하면서, 또 현실에 순응하면서 적응해 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강화군은 출·퇴근 시간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더욱더 혹독한 교통체증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슴에도 수 십년이 흘러도 개선에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지켜지지도 않는 공약들을 난발하며, 군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당선이 되면 이것저것 핑계 대기에 급급하기만 하다. 정작 돌이켜보면 성과 없이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작금에 현실이다. 본지는 강화군 지역발전의 최대 걸림돌이 교통문제 해결에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강화군은 수도권 제1의 자연과 역사·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자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수도권 관광지로써 수도권에 외면당하고 있다. 이유는 “그곳에 가면 교통체증 때문에 길바닥에서 시간을 다 잡아 먹는데 가고 싶어도 엄두가 안 나 네요!”라는 말이 늘상 따라다닌다. 앞서 강화군은 2011년부터 추진한 인천 서구와 연결하는 거첨도~김포 약암리 간 해안도로 2차로 구간을 4차로로 확장하는 사업이 2017년 착공에 들어가 2021년말 개통한다고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당초에 밝힌 2021년말 준공약속은 온대간데 없고 아직까지 착공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이제는 인천시가 밝힌 2023년 12월 준공 약속도 불투명하다. 또한 올해 2월에 발표된 계양~강화간 고속도로 건설공사는 정부의 예비타탕성조사 재정사업평가위원회를 통과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 또한 2001년 이미 예비타당서조사를 통과했으나, 20년간 긴축재정으로 추진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은 전례가 있다. 이 사업은 올해 상반기 타당성평가를 시작으로 2022년 기본 및 실시설계를 하고 2023년 착공, 2023년 준공할 계획이다. 아직까지도 길고도 험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또 어떠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예측불허다. 강화군은 이러한 교통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강화군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인구는 10년 전과 비교해 2433명 증가에 그쳤고 노인인구는 날로 늘어 평균연령이 53세에 이른다. 젊은 사람은 도시로 향하고 중년을 지나 노년기에 고향을 떠난 이들이 다시 귀향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는 정치권을 포함한 군민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 강화군의 미래를 위해 기성세대들이 적극 나서서 이 문제를 화두 삼아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언론 또한 강화군 발전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내어 힘을 보태야 한다. 강화군의 미래세대를 위해 강화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데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강화타임즈도 창간을 맞아 지역현안사항에 대해 지역언론으로서의 역활을 충실히 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