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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인물탐방] "죽산(竹山) 조봉암"

독립운동부터 대통령 선거까지

기사입력 2022.07.28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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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jpg

    <죽산(竹山) 조봉암. (사진=

    (사)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누가복음 23장 22절)

     

    조봉암은 사형 집행 직전 입회목사에게 이 성경구절을 읽어 달라고 하면서 순순히 교수형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사법 살인에 죽산 조봉암은 자신이 무죄임을 확신하였던 듯하다. 마치, ‘악법도 법이다’며 사약을 받았던 소크라테스처럼.


    죽산 조봉암은 1898925일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빈농 집안에서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강릉 유씨(江陵 劉氏)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자 수암(1893), 2자 경암(1896), 3자 봉암(1898), 4자 용암(1902))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 강화군청의 급사로 취업, 1919년까지 일하였다. 1919, 강화에서 유봉진이 주동한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다. 서대문 형무소 수감 중,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각성하게 되었다

     

    출옥 후, 1920년 경성 YMCA 중학부에서 월남 이상재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19217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中央大學(주오대학) 전문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무정부주의에 심취하며, 사회주의 계열 단체 흑도회(黑濤會)에도 참여하였고,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때, 박열, 김약수 등과 조우(遭遇)하게 된다

     

    192210월 레닌이 주도한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웨르흐네스크(Verkhneudinsk) 공산당 회의에 조선대표로 참가하고,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KUTV: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하는 등, 조선 공산주의운동 기수로서의 위상을 다져 나갔다

     

     1924년 신흥청년동맹을 결성, 해주·평양·인천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하던 6, 일생의 동지 김조이(金祖伊)와 결혼을 하였다.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5417일 서울 雅敍園(아서원)에서 조선 최초로 조선 공산당 창당을 결의한 다음날, 박헌영 등과 함께, 고려 공산청년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19251122,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되자, 중국으로 도피하였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조봉암은 도처에서 공산당 조직 활동에 참가하다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7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19329) 1938년 출옥 후, 인천에 내려와 김조이와 재결합한 조봉암은 인천 양곡조합에서 일하다가, 19451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日警(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풀려 난 조봉암은 19465월 남로당 당수 박헌영에게 비타협적이며 좌경화된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행태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며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였다. 성명서(1946623)에서 조선민족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계급이나 정당의 독재나 專制(전제)를 벗어나야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박헌영에게 보낸 개인서신에서 자신이 공산당 활동을 한 것은 日帝(일제) 타도의 수단으로 강력한 조직체 형성을 원한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그 후, 조봉암이 1948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농지개혁을 추진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대지주 계층 중심인 한국 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과감하게 농지개혁을 단행한 조봉암은 지주와 소작농 계급이 대다수를 이루던 농촌 사회의 모순을 해결해 나갔다. 죽산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재선되었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얻어 2위를 기록하였다. 1956년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290만여 표 차이로 이승만에게 패배하였다

     

    영구집권을 꿈꾸던 이승만 정권은 195611월 이중간첩 양명산을 시켜 "북한 공작금과 서류를 조봉암에게 주었다"고 무고하여 조봉암을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시킨다. 1959731일 오전 113, 조봉암은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1958123일자 주한미국대사관은 보고문서(Joint Weeka)에서 ...purported evidence against Cho is, at best, flimsy...(조봉암에 대한 사실이 아닌 증거들도 기껏해야 조악하게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작성하여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을 이승만 정권에 의한 조작으로 보았다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52년이 지난 2011120일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조봉암에게 국가변란 목적의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를 선고하고 복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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