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탐방] 외세에 맞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

강화 8경(江華 8境) 여행

기사입력 2022.04.13 20:20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KakaoTalk_20220412_135006576.jpg
    <강화 광성보 전경. (사진=강화군청)>

     

    바다를 품은 숲 속 작은 성터.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기억은 사라지고 어느덧 평화로운 풍경을 찾아 멀리 발걸음을 옮긴 관광객을 맞이하는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

    광성진이라고 불리기도 한 강화 광성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외세에 맞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지금도 선조의 강한 호국(護國)의 의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등에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강화 광성보는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1658)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처음으로 설치했다.

     

    강화유수 서원이는 인조 5(1627)에 생원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됐다. 효종 9(1658) 4월 강화부 유수로 임용돼 재임기간 동안 효종의 북벌계획을 돕고자 병기를 수보(修補)하고 군량미를 확보했으며, 직장목(直長木)을 포구에 매치(埋置)하여 유사시 목책(木柵) 가설의 재원을 마련하는 등 공을 세웠다. 효종 즉위 후, 호조참판 겸 비변사당상을 겸하기도 했다.

     

    이후 1679(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했다. 1745(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개축됐으며,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명했다.

     

    그 뒤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면서 성책과 문루가 파괴돼 폐허가 된 것을 1976년 강화도 정비 사업으로 복원했다.

     

    강화 광성보가 중요한 유적지로 꼽히는 것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제일 치열한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20412_135203502.jpg
    <광성보 경내에 전시된 포(砲), 좌측부터 대포, 소포, 불량포. (사진=신지현 기자)>

     

    각종 문헌 등에 따르면, 18714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1,23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올 때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 물리쳤으나 미국 해병대가 상륙해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뒤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했다고 한다.

     

    당시 전사한 350여명의 무명용사 무덤(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이 광성보 경내에 세워져 있으며,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 매년 음력 4

    backward top home